때로는 홀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도시인들에게 그런 여유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나마 홀로 하는 당일치기 자동차 여행이라면 잠시나마 정신을 생산적인 고독 속으로 이끌 수 있다. 목적지가 인적이 드문 험지라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좋은 강원 내륙의 한 장소로 New CR-V 터보와 함께 떠나보았다.
겨울의 마을로 향하는 고속도로 |
입동이 갓 지난 평일, 강원 내륙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한국에서 겨울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지역인만큼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산들은 이미 늦가을의 흔적마저 벗었다. 동쪽으로 달릴수록 도로 양쪽의 산들은 가까이 다가왔고 그늘은 짙어졌다.
목적지는 정선군의 화절령길이었다. 외진 폐광 지대로 내비게이션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소수의 오프로드 주행 마니아들 사이에 입소문으로만 알려진 언덕배기의 돌밭으로 동호회 행사를 통해 찾아가본 일은 있다. 겨울에는 인근 스키 리조트를 찾는 사람들은 있어도 이곳까지 오는 사람들은 드물다. 가건물인 산불 감시 초소를 제외하고 인근 주민들의 흔적도 적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New CR-V 터보가 함께 했다. 물론 혼자였다. 시내 구간에선 쉽게 맛볼 수 없는 1.5리터 VTEC 엔진의 독특한 구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배기량은 적지만 VTEC의 이름답게, 높은 회전수에선 제법 앙칼진 소리를 내며 앞으로 덤벼든다. CVT이지만 기어 레버를 주행에서 한단 내려 스포츠 모드로 놓으면 자동변속기처럼 저단 기어비를 유지하면서 엔진 회전수를 올린다. 자연스럽게 24.8kg?m의 최대 토크를 충분히 쓰며 가속감을 느낄 수 있다.
‘ECON’ 버튼을 누르면 상대적으로 가속에 대한 반응은 얌전해진다. 거기에 혼다 센싱이 만들어내는 주행 보조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 연료도 절약할 수 있었다. 워낙 도로에 차가 없다 보니 저속 추종 장치(LSF)가 작동할 이유는 없었다. 오가는 중 추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모드로 달렸다.
힐링 여행도 버틸 하체가 있어야 한다 |
서울에서 화절령으로 가려면 광주-원주 고속도로(52번)에서 경상도와 충청북도, 강원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고속도로(55번)을 이용해 달리다가 제천 분기점에서 나와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태백, 정선 인근은 여름, 겨울 모두 레저 리조트로 유명한 곳이어서 예년엔 자주 붐볐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여파로 올해는 한산했고 굽이진 도로의 그늘은 더 어두웠다.
특히 중앙고속도로 제천 인근 구간과 거기서부터 갈라지는 국도 구간은 포장 상태가 우수하지만 산세를 반영한 선형은 곡선 구간이 많다. 그리고 굽이진 곳은 사시사철 응달이다. 강설이나 결빙이 없더라도 노면이 차가워 마찰력을 잃기 쉽다. 4륜 구동 차종이 요긴한 도로다. 특히 겨울 초입의 구비구비 산길 주행은 한겨울만큼 위험하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채 떨어진 도로 가장자리의 낙엽, 짓무른 은행알 등은 언제든 바퀴를 헛돌게 만들 수 있는데 그럴 때를 대비해서도 4륜 구동은 요긴하다.
New CR-V 터보의 리얼 타임 AWD는 그런 조건에서도 운전자를 안심하게 하는 4륜 구동이다. 서킷에 버금갈 정도로 고속 코너가 연속되어도 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낙엽이 수북한 좁은 산길에서의 걱정도 기우다.
주행 감각은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하다. 과속 방지를 위해 파둔 그루브, 이물질 등을 밟고 지나갈 때 충격은 몽글몽글하게 완화되고 코너링 시 차체 바깥쪽에서 버티는 힘은 완강하다. 생각보다 목적지가 멀어 급한 마음에 코너에서도 페이스를 올렸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는다.
어둠과 바람만 한결 같은 장소 |
화절령은 석탄 산업이 호황이었던 시절 석탄을 실어나르던 운송로의 중간 지점이었다. H 리조트 맞은편 좁은 산길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포장은 끊기지만 평평한 넓은 터가 나타난다. 과거엔 이 근처에만 작은 탄광 1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능선 쪽은 이름난 트레킹 코스로 ‘운탄고도’란 별명이 붙은 곳이기도 하다. 봄이나 가을엔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화절령길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의 형태가 있지만 과거 탄광 지역이었던만큼 크고 작은 암석들이 다져진 험로다. ATV 마니아라면 탐낼 만한 길이다. 국내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혼다는 ATV에서도 명가다. 파이오니어 같은 차량이 있다면 재미있게 놀 만한 곳이다.
물론 4륜 구동이 적용된 자동차라면 꽤 스릴을 즐길 만하다. 물론 무리한 주행은 피하는 것이 좋다. 공도 주행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자잘한 요철들을 부드럽게 걸러내는 느낌이 탁월하고 안정적이라는 걸 느끼는 것으로 만족했다. 타이어는 전폭 235㎜, 편평비 55%이고 직경은 19인치다.
시동을 끄고 리조트 불빛이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웠다. 산 아래보다 바람이 거셌다. 해는 넘어갔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빛이 엷게 산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겨울 저녁 시간을 독점할 수 있는 명소다. 라디오를 켜 지역 주파수를 잡았다. 외졌지만 지대가 높아서인지 주파수가 잘 잡혔다.
이곳은 만약 한겨울 캠핑도 불사하는 사람이라면, 방한 장비를 준비하고 2열 풀 플랫 기능으로 차박 모드를 시전해볼 만한 장소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겨울바람 소리가 꽤 무서워 열선 시트를 켜고 옷으로 무릎을 덮었다. 온기가 다리를 감쌌다. 스티어링 휠 열선도 켰다. 그대로 몸이 노곤해지고, 흐려지는 풍경을 따라 정신도 그러려고 했다. 백색소음 같은 바람소리 속에서 잡생각들이 희미해졌다.
어느 순간 또렷한 라디오 시그널 때문에 눈을 떴다. 5분 정도 졸았을까? 하루 정도 여유가 더 있다면 내친 김에 정동진 해돋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이 정도 여유가 어디인가? 조용히 가속 페달을 밟아 나만의 험로를 잠 깨듯 벗어났다.
생각해보니 꽤 긴 거리를 달렸는데 완충에서 약간 모자란 상태로 출발했던 유류 게이지는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평균 주행 연비 17km/L, 돌아가는 데 무리는 없을 수준이었다. 최근 3세대 CR-V를 51만km 넘게 주행한 한 60대 신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각 지역 현장을 오가는 건설 기업가였는데 그가 오랫동안 CR-V를 타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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