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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소식

다시, 이런 드라마는 없다! 혼다 오리진 스토리

혼다코리아 2023.04.20 252

멕시코 현지 시간으로 지난 11월 7일, 포뮬러 원 멕시코 그랑프리는 레드불 혼다에게 매우 뜻깊은 순간이었다. 시즌 챔프를 향해 달려가는 막스 페르스타펜(#33)이 우승을 그리고 자국 국적의 드라이버로서는 드물게, 세르히오 페레스(#11)가 3위에 올랐다. 멕시코 GP는 56년 전인 1965년, 혼다가 처음으로 포뮬러 원 그랑프리 우승을 거둔 그 대회다. 올해로 컨스트럭터로서 시즌을 종료하는 혼다는 예정된 기적을 완수할 태세다.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지만 혼다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렇게 드라마틱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제조사와도 다른 혼다만의 역사는 차라리 드라마다. 그 원점을 잠시 살펴보았다.

 

 

 

 

 

충신과 대적자, 혼다를 일군 사람들
후지사와 타케오 & 나가시마 요시오

 

 

최근 기업 문화와 관련된 담론이 많다. 그만큼 세계 경제계가 큰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 문화를 논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리더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충신’과, 지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어찌 보면 대적자와 같은 존재다. 충신이 좋은 것 같지만 두 유형 모두 기업의 성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이다. 충신은 리더가 좌절하지 않게 하고, 대적자는 리더가 놓칠 수 있는 가치를 보게 한다.
혼다 소이치로와 함께 혼다를 일군 후지사와 타케오(1910. 11. 10~1988. 12. 30)와 혼다 최초의 포뮬러 원 그랑프리 우승을 이끈 나카무라 요시오(1918. 9. 8~ 1994. 12. 3)가 바로 이런 충신과 대적자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다.

 

 

만년의 혼다 소이치로(왼쪽)과 후지사와 타케오(오른쪽)

 

 

혼다 소이치로보다 4살 어린 후지사와 타케오는, 최초의 보조 엔진 자전거를 만들고 회사를 설립하느라 빈털터리가 된 혼다를 진심전력으로 받쳤던 실질적 경영자였다. 혼다 소이치로의 집에 아내 혼다 사치가 있었다면 혼다에는 후지사와 타케오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4년, 결함과 경영위기로 모두가 실의에 빠졌을 때 혼다 소이치로가 아일랜드의 맨 섬에서 열리는 TT(Tourist Trophy)를 직접 보고 견문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일찍부터 장사에 대한 감각을 익힌 그는, 판로를 개척하고 자금을 관리하는 데 천부적이었고 태생적으로 남들로부터 신뢰받는 면모를 갖고 있었다.

 

 

 

 

나카무라 요시오는 2차 세계대전 중 그 유명한 제로 전투기 제작에 참여했던 엔지니어다. 1964년, 실제 포뮬러 원에 참여했을 때, 불과 20년 전 적국으로 서로를 등졌던 서방 기자들도 그가 ‘제로센’의 엔지니어였다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정도다. 그는 1958년에 혼다에 입사한 이후 바로 모터스포츠 부문으로 배치됐는데 특히 동역학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것이 오히려 혼다 소이치로 충돌했다. 모든 부품을 강하고 튼튼하게만 만들려 했던 혼다 소이치로와, 거동의 효율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주창했던 그는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승하기 위해선 다른 브랜드들처럼 루카스 사의 것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와, ‘혼다 기술로 우승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던 혼다 소이치로의 기싸움은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1965년 10월, 멕시코 GP에서 첫 포뮬러 원 우승을 거둔 직후 리치 긴터와 함께 한 나카무라 요시오(왼쪽에서 두 번째)

 

1968년 RA301 머신과 함께 한 나카무라 요시오 

 

 

결국 나카무라 요시오는 1965년 혼다의 첫 그랑프리 우승에 기여하지만 총괄자가 아닌 서포트 역할이었고, 그 후에도 이직과 복귀를 반복했다. 그러나 현재 혼다가 지금처럼 어떤 차종에서도 거동이라는 기본기를 갖추게 된  데는 숨어 있는 그의 공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모터스포츠계에서 나카무라 요시오를, 혼다의 신화 속에서 과소평가된 영웅으로 꼽을 정도였다.

 

 

 

모든 것 그 이상을 건 엔지니어,
혼다 그 자체인 혼다 소이치로

 

 

혼다 소이치로는 광적일만큼 자신의 ‘직(職)’ 즉 기술자로서의 본분에 집중했다. 1961년, 맨 섬 TT 레이스에서 혼다가 우승했을 때, 주요 매체들이 ‘시계 같은 디테일’에 주목하며 충격을 표한 것도 혼다의 고집스런 신념이 기반이 된 것이다. 혼다 소이치로는 사장이 아니라 작업장의 ‘오야지(おやじ)’라 불리길 원했다. 총리의 초청에 작업복을 입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은퇴 전까지도 지속했던 수많은 망치질과 연장 작업을 했던 그의 손은, 받침 역할을 했던 왼손 손가락이 오른손보다 1센티미터나 짧았다. 이런 면모는 미국인 엔지니어들조차 감동시켰다. 1982년에 미국 기계기술자 소사이티로부터 공로 메달을 받은 것이나, 1989년에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디트로이트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1982년, 혼다 미국 공장에서 첫 생산된 어코드. 오른쪽은 혼다 소이치로의 뒤를 이은 카와시마 키요시 CEO 

 

 

사실 혼다 소이치로가 처음부터 대단하고 천재적인 엔진을 만들어낸 건 아니었다. 1947년, ‘굴뚝(chimney)’ 엔진은 창의적이지만 원시적인 기술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단계에서도 균형과 완결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한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었다. 실제 혼다 소이치로의 균형에 대한 연구는 이후 자동차든 모터사이클이든 모든 종류의 엔진에서 혼다의 핵심 기술이 됐고, 이를 기반으로 후배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특허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47년, 침니 엔진의 프로토타입

 

 

맨 섬 TT 레이스를 참관하고 온 혼다 소이치로(왼쪽) 

 

 

여기에 세계 수준의 모터스포츠에서 얻은 경험은 그 진화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혼다 소이치로는 실제로 TT 레이스를 참관하고 유럽 브랜드들의 모터사이클 부품을 잔뜩 구입해 가방에 넣어 가져올 정도로 실체적인 연구였다. 물론 당시 가져간 돈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그의 엔지니어 정신은 배짱 좋은 도전 정신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1960년대 초, 혼다가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려 할 때 일본 통상성은 ‘특별산업진흥 임시조치법(특진법)’이라는 것을 입안하려고 했다. 자유무역 시대를 맞이해 일본 국내 전략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봐도 혼다가 새로이 진입하는 것을 꺼린 특정 기업과 결탁한 정부 기관의 ‘농간’이었다. 이에 혼다 소이치로가 일본주 수 병을 들고 통상성을 찾아가, 몇날 며칠 밤이든 토의할 용의가 있으니 통상성 대신(장관)을 불러오라고 버텼던 일화도 있다. 혼다는 이 특진법이 통과되기전 자동차 시제품 2종을 선보였는데 그 중 하나가 S360 스포츠 쿠페와 T360 경형 트럭이었다. 결국 특진법은 무산됐는데, 특진법 없이도 1960년대 일본 자동차 산업은 급속한 성장을 기록했다. 

 

 

1962년 도쿄 모터쇼에서 선보인 혼다 S360 스포츠카 

 

 

참고로 혼다의 경형 스포츠카와 경형 트럭은 지금도 진행형의 전설이다. 특히 T360 경형 트럭은 2019년 11월, 인기 경상용 트럭 액티를 통해 55주년 기념 모델로 부활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4륜 구동까지 적용되는 액티는 일본 농업계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경형 트럭이다.

 

 

혼다의 인기 경상용 트럭 액티를 기반으로 부활한 T360 55주년 기념 에디션 

 

 

 

2년 간의 악수 여행,
공장별 감사회로 보답받다

 

 

혼다는 혼다 소이치로라는 명장(名匠)이 이끌고 갔지만 결코 혼다 소이치로 혼자서 또는 혼다기연공업 단독으로만 성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까다로운 요구에 부응해주던 협력업체와 금융권 등도 있었다. 특히 1954년, 후지사와 타케오의 진심에 응해 물품 대금 지불 연기에 응해 주었던 협력 업체들에 대한 고마움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혼다 소이치로가 은퇴 이후 2년 간의 ‘악수 투어’라고 불린 감사의 만남은 함께 하는 기업으로서의 혼다의 가치를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아들들’이라 부르던 혼다 직원들이었다. 누군가가 혼다 소이치로에게, 아들인 혼다 히로토시에게 왜 회사를 물려주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그렇게 한다면 다른 아들들이 누굴 믿고 일한단 말인가”하고 일갈했다. 혼다 소이치로는 자신의 최대 과오가 회사명을 ‘혼다’라고 지은것이라 말할 만큼 가족 경영의 위험성을 경계했던 것이다. 직원들을 아끼는 진심은 1983년 10월, 혼다 설립 35주년 기념 연설에 담겨 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힘든 시간을 견뎌내며 최선을 다해 준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그간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는데, 참아주어서 고맙습니다! 소리 지른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여느 ‘회장님’들의 격을 차린 일성이 아니라, 오랜시간 엔지니어로서 동고동락해 온 작업장의 ‘아버지’다운 메시지다.


1991년 8월 5일,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의 장례를 회사장으로 하는 것도 금했다.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려고 기계를 만들었는데 불편을 끼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많은 이들은 공장별로 감사회를 열어 각계 각층의 인사를 받았는데, 감사회 방문객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에필로그 : 멈추지 않는 꿈

 

 

참고로 아들인 혼다 히로토시도 자신만의 튜닝 및 레이싱 브랜드 ‘무겐’을 설립해 일가를 이뤘다. 아버지의 노년 모습을 똑 닮은 그는 최근까지 무겐 모터스포츠 영국 지사에 머물며 부친이 혼다 역사의 초기에 애정을 쏟았던 맨 섬의 TT 레이스에 많은 역량을 할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혼다 소이치로의 꿈은 그가 세상을 떠난 30년 이후인 지금도 이뤄지는 중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2014년 세상에 등장한 혼다 제트는 현재 개인용 제트기 분야에서 꾸준한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향후 전동화 기술까지 더한 eVTOL까지 선보일 계획이다. 또한 지난 10월 21일에는 NBAA 비즈니스 항공 컨벤션 전시에서는 오버 더 윙 엔진 마운드 방식의 비즈니스용 제트기인 혼다 젯 2600 콘셉트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항공기는 일반적인 제트기보다 20%나 개선된 연료 효율성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70여 년의 시간 동안 혼다 브랜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꿈’이었다. 혼다를 만든 초기의 인물들이 뭉칠 수 있었던 계기도 그것이었고, 포뮬러 원에 도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꿈이었다. 세계에 꿈이 있는 한 혼다가 존재할 이유는 분명하다는 것을, 혼다의 초창기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